오온 오법신 – 좌보가 해탈하는 길
五蘊五法身 - 左輔的解脫之道
˙文曲(色蘊)之破解,在於「以文載道」,無益之於人的話,少開口。
若深層去了解它,就是修自己的---「身.口.意」三德,
<意是內聖.身.口.是外王>.朱子語
문곡(색온)을 자세히 뜯어서 풀이하면, 「글로써 도를 밝힘」에 있으며 사람들에게 무익한 말은 입을 잘 열지 않는다.
만일 이를 심층적으로 이해하자면 이는 자기의 ---「몸. 입. 뜻」의 세 덕을 수양하는 것으로서 〈뜻은 내부의 성인이고 몸과 입은 외부의 왕이다〉. 주자의 말
주註:
丙天干的廉貞化忌,與己天干的文曲化忌,若能組合而又在內局,一定會有蔭。
但此'蔭'是一種物質面的.如得到財.不動產……是一種有限.有漏.的福報而已。
병천간의 염정화기와 기천간의 문곡화기는 만일 능히 조합이 되고 게다가 내국에 있으면 반드시 도움蔭이 있다. 단 이 ‘도움蔭’은 일종의 물질적인 측면이어서 가령 재財나 부동산을 얻으면................. 이는 일종의 유한하고, 누설되는 복보福報일 뿐이다.
因為:『丙天干是面對天同化祿。
→ 以'財'自居的福蔭。
己天干是面對武曲化祿。』 (與人際有關,世間的花報 現世報)
왜냐하면: 『병천간은 천동화록을 대면한다。
→ '재財'로써 스스로 거居하는 복음福蔭이다。
기천간은 무곡화록을 대면한다。』 (인제人際(인간관계)와 유관하며,세간世間의 화보花報인 현세보現世報이다.)
주註:
天梁也是蔭星,但此'蔭''字,不偏向物質面,反偏向'德'蔭,是無漏之蔭。
是一顆人在世間,多需'培德'.'積德'之星。所以孔子曰:「積善之家必有餘慶」。
即是此意。(在斗數.指的是天梁星)
천량天梁 역시 음성蔭星이지만,단 이 '음蔭''자字는,물질면에 편향되지 않으며,오히려 '덕德'음蔭에 편향되고,이는 누설되지 않는 도움蔭이다.
이 일과一顆의 사람은 세간에 있으며,대체로 반드시 '배덕培德'. '적덕積德'하는 별이다。 따라서 공자 가라사대: 「적선積善하는 집안은 반드시 경사가 넘친다.(주역 곤괘 문언전)」。
바로 이 의미이다。 (두수斗數에서는 천량성天梁星을 가리킨다.)
˙『 (乙)天干有天梁化權---- <過去報>
(己)天干有天梁化科---- <現世報>.又名<花報>
(壬)天干有天梁化祿---- <未來報>.又名<餘報> 』
˙ (을)천간에는 천량화권이 있다---- <과거보過去報>
(기)천간에는 천량화과가 있다---<현세보現世報>. 다른 이름은 <화보花報>
(임)천간에는 천량화록이 있다---- <미래보未來報>.다른 아름<여보餘報> 』
˙天梁是'德'蔭之星宿『 得人者昌 (扶其正)
失人者亡 (扶其不正) 』
천량은 덕'德'음蔭의 별로서『 득인자得人者는 번창昌하고 (그 정正을 돕는다)
실인자失人者는 망亡한다 (그 부정不正을 돕는다) 』
주註:
「福」星得與不得的問題,(與德未必有關).求福.惜福都是現象界。
「德」是該與不該的問題,(與福未必有關).一個人.有的德高望重.福至全歸。而世上的賢達者都是德大於福的太多,而名留千古,故有曰:「命中該有皆須有,因為他們能聖能賢,秉持著物歸有主」的信念.所以自然不求於做作---「有德者得之」。<實相世界> (如孔子的述而不作)
「복福」은 득得과 부득不得의 문제이며,(덕德과 반드시 유관有關하지는 않음). 구복求福. 석복惜福은 모두 현상계現象界이다.
「덕德」은 해該와 불해不該의 문제이며,(복福과 반드시 유관有關하지 않음). 일개인이 덕德이 높고 우러러 봄이 중重하면 복福이 전부 회귀한다。 그런데 세상의 현달자賢達者는 모두 덕德이 복福보다 큰 것이 대부분이며,그래서 이름이 천고千古에 남고,따라서 가라사대:「명중命中에 있어야 할 것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그들은 능히 성현聖賢이 되고도 남음이 있으므로,물物을 움켜쥐면 돌아갈 주인主人이 있다는」 신념信念이며 따라서 자연히 (일부러) 지어서 만든 것에서는 구하지 않는다---「덕德이 있는 자者는 얻는다」。<실상세계實相世界> (가령 공자孔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서술해서 전할 뿐 스스로 짓지는 않음))
˙「福」是陰陽邊底事。
「德」是太極法身人。 <張三丰>
˙「복福」은 음양陰陽 주변의 일이다。
「덕德」은 태극법신太極法身하는 사람이다。 <張三豊: 太極拳의 창시자>
至於左輔,它有解脫之道嗎? <破行蘊之迷執>
좌보左輔에 이르면,그것에는 해탈解脫의 길이 있는가? <행온의 미집迷執을 파破함>
在五分法身中,壬天干的左輔,就是「眾生因它而有''生住相''。但也因有''生住相」而得解脫之道。
오분법신五分法身 중에서,임천간의 좌보는,비로 「중생이 이것으로 인해 '생주상生住相'이 있다。 하지만 ''생주상生住相」이 있기 때문에 해탈의 길을 얻는 것이다。
역주)생주상生住相: 주관세계에 삶
它的重心在「智慧解脫」,以「無住」為本。
그것의 중심은 「지혜智慧로써 해탈解脫」에 있으며 「무주無住(머물지 않음)」로써 본本을 삼는다.
它的方法,是---「般若的觀照與空 慧的灑脫」。
(住 相)
그것의 방법은,바로---「반야般若의 관조觀照와 공혜空慧의 쇄탈灑脫」이다。
(주住 상相)
(引用哲學.就是在相忘象).是活在當下的盡性逸然中。
(철학哲學을 인용하면 바로 망상忘象인 상相에 있음). 이는 당장 눈앞의 일로써 본성을 다하고 안일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역주)반야般若: 범어 Prajñā;팔리어 paññā,혜慧、 지智、 지혜智慧를 뜻한다.
쇄탈灑脫: 거리낌이 없다. 소탈하다.
주상住相: 매개인 마음속에 부가된 가치관
金剛經有云:「菩薩應離一切相……不應住''色''生心。
<生數>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成數>應生無所住心。若心有住.則為非住」。
금강경에 이르기를:「보살은 응당 일체의 상相에서 떨어져야 하고……주住''색色''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에 응하지 않는다。
<생수生數>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에 주住(머뭄)하려는 마음이 생김에 응하지 않고, <성수成數>주심住心할 바 없는 생에 응한다。 만일 심心이 주住할 수 있으면 곧 비주非住(머물지 않음)가 되는 것이다」。
주註:
任何經典的一切法,一切心的''一切'',都是指世間法,如「一入一切,一切入一」,都是世間相法。實相世界是中性的,不言一切法,一切心。只是「理體的如實」。
어떤 경전經典의 일체一切 법法이라도,일체一切 마음의 ''일체一切''이며,모두 세간법世間法을 가리키고,가령 「하나가 일체一切에 들어가고,일체一切가 하나에 들어간다면」,모두 세간世間의 상법相法이다。 실상세계實相世界는 중성적中性的이고,일체一切 법法,일체一切 심心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실實과 같이 이체적理體的이다」。
左輔在此分兩段解。
좌보는 여기에서 두 단계로 나누어 풀이한다.
<一>所謂行蘊的行,即意念。(由己<文曲>的身.口.意證伸出來)吾人之意念總是剎
那剎那地運行不已,故謂之「行」。(前文提示的掉舉.不能安其心.都與意念
有關)吾人若對此運行不已之意念迷執,則將障蔽本性之光輝,故謂之行蘊。
(行陰)為了破除行蘊,故禪宗講究無念的功夫。壇經有言:「我此法門,從上
己來,先立無念為宗」。可見無念即是禪宗的宗旨所在。
古德云:「禪為佛心」。禪講無念。故佛心即是無念之心。
吾人修行若達無念之境界,則能明心見性,證佛之法身。<見P.20>
<己> <壬> <戊x己>
※獨無文昌
..<一 > 이른바 행온行蘊의 행行은 즉 뜻을 새김(意念) 이다. (기己로부터 나온 <문곡文曲> 의 몸身 입口 뜻意에서 증거하여 나온) 우리가 뜻을 새김은 결국 찰나의 운행運行일 뿐이며 따라서 행行이라 일컫는다. (전문前文에서 제시한 도거掉舉는 그 마음을 편안히 할 수 없으며 모두 의념意念과 유관함) 우리가 만일 이 운행을 못다함에 대한 의념意念에 빠진다면 곧 본성의 빛남이 가로막히게 될 것이며, 따라서 행온行蘊이라 한다。
(행음行陰) 행음은 행온行蘊을 깨버리므로 따라서 선종은 뜻을 새기지 않는(無念) 쿵푸功夫(노력)를 강구한다. 육조단경壇經에 이르기를 :「우리 이 법문法門은 본래부터 몸己으로는 먼저 아무것도 마음에 새기지 않음(無念)을 종지宗로 한다。」 아무것도 마음에 새기지 않음에 즉 선종禪宗의 종지宗旨가 소재함을 알 수 있다。
고덕古德 대사가 이르기를 :「선禪이 붓다의 마음이다 」。선禪은 뜻을 새기지 않음(無念)을 이른다。 따라서 붓다의 마음이 즉 뜻을 새기지 않는 마음이다。
우리의 수행이 만일 뜻을 새기지 않는(無念) 경계에 도달하면 곧 능히,마음을 밝혀 본성을 볼 것이며明心見性,붓다를 증거하여 본받는 몸이 될 것이다證佛之法身。< P.20>
< 己> < 壬> < 戊X己 >
기간 문곡과 임간 좌보는 무간 우필 X 기간 문곡
※오직 문창文昌만 없다.
역주) 문곡의 색온을 파해하면 몸身 입口 뜻意으로서 뜻은 내성內聖에 도달하고 몸과 입은 외부적으로 왕王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좌보의 행行(불안한 마음)을 깰 수 있다.
무간 우필의 無念과 기간 문곡의 몸으로 증거함 이 법신法身 만나면 붓다의 경지에 이른다. 본래 우필은 식온識蘊으로서 의념意念에 해당하지만 이를 깨쳐 무념無念에 도달할 수 있다. 선禪은 선蟬(매미)과 뜻이 통한다. 매미는 유충이 알에서 깨어나는 햇수가 일정하지 않다. 천적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것이다. 매미가 고치가 된 다음에는 자신이 깨어날 날을 모르는 것이다. 매미가 깨어 나는 해는 짝수 해가 아니며 배수인 해도 아니다. 즉 소수素數인 13년 혹은 17년, 23년 만에 깨어난다. 일부 문화권에서 보이는 헬리콥터 모양의 청동 기물은 사실 매미이다. 사람이 죽으면 이 매미 모양의 청동 기물을 혀에 물리고 매장한다. 태어날 해를 모르게 해서 전생을 분간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윤회輪回의 사슬이 끊어진다고 믿었다.
凡夫之念即馳求貪執之心。<欲界貪>所謂無念,即對萬事萬物沒有求貪執之心(即無住想)。猶如吾人行動之先必有念頭生起,像先有吃飯的念頭才有吃飯的行動,此行動就是一種行為。(左輔亦名行為)→但它是由於你意念產生後所做的行為。
필부의 의념意念은 곧 달려가 탐욕스럽게 집착하는 마음을 구한다。 <욕계탐欲界貪> 이른바 무념無念은 즉 만사만물에 대하여 탐욕스럽게 집착하는 마음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즉 무주상無住想)。 마치 우리가 행동하기 전에 반드시 염두에 둘 일이 생겨서 마치 먼저 밥을 먹을 생각을 미리 해두어야 비로소 밥을 먹는 행동을 하게 되며 이 행동은 일종의 행위이다。(좌보左輔를 달리 행위行為라 이름한다)→다만 이것은 당신에게 의념意念이 생겨난 후에 하는 행위이다。
주註:
˙左輔稱它無名,巨門也是無名,差別在哪裡?
左輔的行為是慣性地,用習慣性的思考模式所產生的行為,有''動能''性,
是故,其內心當然就閒不下來,奔馳在萬事萬物中。(內涵,有做作)
좌보는 이것을 칭하여 무명無名이라 하고 거문巨門도 역시 무명無名인데 구별은 어떻게 하는가?
좌보의 행위行為는 관성慣性적으로서,습관성적인 사고思考 모형을 써서 산생하는 행위로서,'동능'動能''성性(능동성)이 있으며,
따라서,그 내심內心은 당연히 한가롭지 못하고,만사 만물 중에서 달려 나간다。(내포하는 의미는,일부러 지어서 만듬이 있다)
˙巨門的行為是習性也,它不需加以任何思考模式,且習慣性的表現出來,
如坐姿隨人所好。(內涵,無做作)故,巨門像大地。<有似''靜能''性>
거문의 행위는 습성習性이라서 그것에는 어떠한 사고 모형을 더할 필요가 없으며 게다가 습관성習慣性적인 표현이 나와서,
가령 앉은 자세로 사람을 따르는 것을 좋아한다。(내포하는 의미는,일부러 지어서 하는 일이 없다) 따라서 거문巨門은 마치 대지大地와 같다。<''정능靜能''성性(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머뭄)에 유사>
※ 좌보左輔 → 증오가 있고有憎、 사랑이 있고有愛、 한이 있고有恨、 원수가 있고有仇……
거문巨門 → 기쁨이 있고有喜、 우려가 있고有憂、 고통이 있고有苦、 즐거움이 있고有樂……
若將一切念頭全部切斷,則一切活動便全部中止。而禪宗的無念法門,不是要你什麼都不要想,都不要做,且靜靜地打坐或禪定即是。假以修行人是這樣想,離見性,離明心,尚是遙不可及的。(等於白做工)。
만일 일체의 염두念頭를 전부 중단하면 곧 일체의 활동이 전부 중지된다。 그리고 선종禪宗의 무념법문無念法門은 당신이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필요는 없으며 게다가 조용히 앉아 있거나 혹은 선정禪定(참선)하면 된다。 가령 수행인이 이처럼 생각해서 견성見性에서 멀어지고 명심明心에서 멀어지면 언제나 아득히 멀어 도달할 수 없다。(헛일하는 공인工人과 같다)。
「無念」絕不是完全沒有念頭,最徹底的無念,誠如<神會語錄>所言:「念不起,空無所有,明正定;能見念不起,空無所有,名為正慧」。所謂「念不起」,就是不作意。他說:「不作意及無念;無念體上自有智命」。
「무념無念」은 절대 완전히 염두念頭가 없는 것이 아니며 가장 철저한 무념은 성실하기가 마치 <신神을 만난 어록〉에서 말하는:「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전혀 소유가 없고 밝게 정정正定(마음을 바르게 집중함)한다.; 한편 능히 의념을 일으키지 않음을 보고 전혀 소유가 없으면 이름하여 정혜正慧라 한다」。 이른바 「의념을 일으키지 않음은」 바로 부작의不作意이다。 그가 말하기를:「부작의 및 무념은; 무념無念의 체體 위에 스스로 있는 지명智命이다」。
不作意的「作」,做起意解。也就是說,不起任何之念頭,如是的想,如是的做,就可以了。不須找別人「背書」,就對了。
부작의不作意적인 「작作」은 하기 시작한다는 의미로 풀이한다。 말하자면 어떠한 염두念頭도 일으키지 않고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하면 가능하다。 반드시 다른 사람의 「배서背書」(보증)를 찾을 필요가 없으며 그것이 맞는 것이다。